[글로벌 전망대] 중남미에서 벌어지는 ‘21세기 골드러시’ 모든 것
안전자산 열풍 뒤에 숨은 글로벌 광산 현장과 중남미의 ‘현대적 수탈 구조’
금·은 가격 폭등 이면에 자리한 공급 불균형·ESG 갈등·역사적 구조 불평등
올해 국제 귀금속 시장은 그 어느 때보다 격동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 특히 금과 은 가격은 2025년 3분기를 거치며 과거 최고치를 가볍게 넘어서면서 급등세를 이어가고 있다. 11월 초 기준 국제 시장에서 형성된 금 가격은 트로이온스(약 31g)당 약 4000달러 수준에 도달했다.
이는 주요 국제금융기관과 통계 플랫폼인 트레이딩 이코노믹스(Trading Economics)가 추적한 기준으로도 역대 최고치에 근접한 수준이다. 은 가격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같은 기간 평균 약 48달러 선에서 거래되며 2024년 같은 시기 대비 거의 두 배 상승했다.
전년 동기 대비 100% 가까이 상승한 이 기록적인 가격 인상은 단순한 시장 변동성을 넘어 세계 경제와 산업 구조, 그리고 지정학적 환경의 근본적 변화를 반영한다. 전문가들은 달러 약세, 글로벌 지정학적 위기, 주요국 중앙은행의 금 매입 확대, 미국의 금리 인하 기대, 환경·산업 구조 변화, 공급 제약 등의 복합적 요인이 맞물려 금·은 가격을 끌어올렸다고 입을 모은다. 특히 은의 경우 태양광·전기차·5G·AI 기반 산업 급성장에 따른 수요 폭증이 직접적 원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원인이 다양하게 얽혀 있지만, 핵심은 단순하다. 금과 은 수요는 여러 이유로 빠르게 늘어나고 있는데 반해 공급은 제약과 구조적 한계로 인해 증가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즉, ‘수요 증가→가격 상승 압력’, ‘공급 감소→가격 상승 압력’이라는 고전적 경제 논리가 여러 차원을 통해 동시에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금·은이 귀금속이면서도 산업재와 금융자산의 성격을 동시에 가진 복합적 자산이라는 점이 이러한 가격 급등을 더 빠르고 민감하게 증폭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글로벌 위기와 금융 불안에 ‘안전자산 쏠림’
현재 세계 경제와 국제정치는 다층적 위기 국면에 놓여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장기화하며 국제 에너지·곡물 시장뿐 아니라 안전자산 수요에도 지속적 충격을 준 상태다. 중동에서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갈등이 퍼지고 있으며, 미·중 패권 경쟁은 정치·군사·무역·기술 전 영역에서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런 국제 불확실성은 과거 사례와 동일하게 금 가격 상승을 촉발하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해왔다.
대표적 안전자산으로 꼽히는 금은 위기 상황이 장기화할수록 세계 투자자들로부터 빠르게 자금이 유입된다. 과거 금융위기, 지정학적 충돌, 글로벌 경기침체 국면에서도 동일한 흐름이 반복된 바 있다. 그러나 올해 상황은 특히 더 복잡하다. 당장 각국 중앙은행들까지 금 매입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러시아·인도·튀르키예·폴란드 등이 대표적 국가들로, 달러 의존도를 낮추고 외환 보유고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차원에서 금 비중을 큰 폭으로 늘리고 있다.
이른바 ‘탈달러화 흐름’은 지정학적 위기와 맞물리며 금 수요를 구조적으로 확대하고 있다. 여기에 고물가·고금리·저성장 상황의 장기화로 인해 실질금리가 낮아진 점도 금 수요를 늘리는 요소다. 명목금리가 상승하더라도 물가상승률을 이기지 못하면 실질금리는 낮아지고, 그 결과 현금·채권 등 금리자산보다 금·은 같은 실물자산이 상대적으로 매력이 커진다.
또한 금·은 ETF·선물 등 금융상품으로의 투자증가도 가격 상승을 가속하는 경로가 되고 있다. 금융상품을 통한 투자금은 실물 공급과 무관하게 가격을 빠르게 끌어올리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공급 측면에서는 오랜 기간 누적된 구조적 제약이 본격적으로 가격에 반영되고 있다. 금과 은의 공급은 단기간에 크게 늘리기 어려운 자원 특성을 가진다. 이미 많은 국가에서 고품위 광석이 고갈되기 시작한 데 더해, 최근에는 광석 품위 저하가 심화되었다. 과거 톤당 10g 이상 금을 추출할 수 있는 고품위 광석이 흔했지만, 현재는 톤당 1~3g 수준이 일반적이다.
이는 동일한 양의 금을 확보하기 위해 훨씬 더 많은 양의 광석을 캐야 한다는 의미이며, 이는 곧 장비·인력·에너지 등 모든 생산 비용 상승으로 직결된다. 특히 2020년 이후 글로벌 공급망 충격으로 인한 장비 가격 인상, 에너지 비용 상승, 인건비 증가 등이 광산 운영비를 크게 끌어올렸다.
여기에 환경영향평가(EIA) 의무 강화, 원주민·지역 주민 동의 절차, ESG 경영 기준 도입 등 규제가 전 세계적으로 강화되면서 신규 광산 발굴에서 생산까지 이어지는 전체 과정 기간이 크게 길어졌다. 과거에는 수년이면 가능했던 프로젝트가 7~15년 이상 지연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고, 지역사회 반발이나 환경 훼손 문제로 착공 단계에서 무산되는 경우도 많다.
공급 충격의 진앙지, 세계의 시선은 중남미로
또한 중남미·아프리카·동남아 등 주요 광물 생산 지역에서는 자원 국유화 정책, 로열티·세율 인상, 정부의 규제 강화, 정치적 불안정 등으로 광산 프로젝트가 불확실성에 더 크게 노출되고 있다. 파나마의 대형 구리·금 광산인 코브레 파나마(Cobre Panama)가 채굴권 논란으로 2023~24년 장기간 사업 중단에 들어간 사례는 공급 리스크가 실제 시장에 얼마나 크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금 재활용 공급 역시 전체 시장의 25~30%를 차지하는 주요 공급원임에도 불구하고 최근 증가 폭이 제한적이다. 재활용 금은 경기 상황에 따라 증가할 것으로 기대되지만, 실제로는 시장 상황과 소비자 행동이 유기적으로 맞물리면서 기대만큼 늘지 못했다.
은의 경우 금보다 가격 상승폭이 더 빠르고 강하다. 그 이유는 명확하다. 은은 전기전도율이 금속 중 가장 높은 자원으로, 태양광 패널·전기차(EV)·반도체·AI·5G 네트워크 등 2020년대 중반 핵심 산업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필수적으로 사용된다. 2025년 현재 세계 전력망 확충, EV 보급 확대, 태양광 설비 증가, AI 반도체 수요 폭증 등으로 산업용 은 수요는 여러 국가에서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는 추세다.
그러나 공급 구조는 산업 수요 확대를 따라잡기 어렵다. 세계 은 시장의 약 70~75%는 은광이 아닌 구리·아연·납·금 광산에서 부산물 형태로 생산된다. 이는 모(母) 금속의 생산량이 줄면 은 생산도 자동으로 줄어드는 구조적 한계를 의미한다. 구리·아연 산업이 정책 리스크나 가격 변동성 등으로 조정을 받으면 은 공급은 즉각적인 영향을 받는다. 신규 은광 개발도 금과 마찬가지로 비용 문제, 환경 규제 문제, 지역사회 반발 등으로 속도를 내기 어렵다. 즉, 은값 상승에 대응한 공급 확대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거나 매우 제한적이라는 점이 은 가격 급등의 배경이다.
국제 금·은 가격이 급등하자 전통적 생산지인 중남미가 다시 국제자원시장의 중심으로 소환되고 있다. 중남미는 2025년 기준 세계 금 생산량 약 14%, 은 생산량 55% 이상을 책임지는 자원의 보고다. 그러나 이 지역이 금·은 가격 상승의 ‘진정한 수혜 지역’이라고 보기에는 여전히 넘어야 할 구조적 과제가 많다.
중남미의 금·은 산업은 16~19세기 식민지 시기 유럽 제국주의의 자원 약탈 역사에서 기원한다. 볼리비아 포토시와 멕시코 사카테카스·과나후아토 은광에서 채굴된 금·은은 잉카·아즈텍 지역 원주민 강제노동에 기반해 수백 년 동안 유럽으로 유출되었다. 스페인·포르투갈은 금속 생산량 5분의 1(‘왕의 몫’)을 세금으로 징수했고, 채굴된 금·은은 세비야항을 통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스페인이 확보한 은은 다시 필리핀 마닐라-멕시코 아카풀코 항로를 통해 중국으로 흘러 들어가 비단·도자기와 교환되며 세계 최초의 글로벌 무역망 형성에 기여했다. 이 과정에서 유럽의 상업혁명·가격혁명·산업혁명이 촉발되었고, 상공업·금융자본은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반면 중남미 지역에는 노동력 손실, 생태계 파괴, 빈곤의 심화라는 부정적 유산만 남았다.
2025년 오늘날, 외형은 크게 달라졌지만 구조는 여전히 유사한 측면이 있다. 중남미 국가들은 민주화 이후 자원 국유화 정책, 로열티 조정, 환경·인권 관련 관리규제 도입 등 여러 시도를 이어왔지만, 대형 광산 운영 주체는 여전히 글로벌 다국적기업이다.
중남미의 3R과 한국의 ESR…자원 협력 모델 찾아야
이들 기업은 채굴-수출-이윤 환류 구조를 통해 상당한 이익을 확보하고 있으며, 현지 지역사회는 환경오염과 사회적 갈등 비용을 부담하는 사례가 반복된다.
글렌코어(Glencore), 배릭골드(Barrick Gold), 앵글로 아메리칸(Anglo American) 등 글로벌 광산 기업들이 페루·볼리비아·아르헨티나 등지에서 운영하는 광산들은 지역 주민들과의 충돌,환경 규제 문제, 분배 문제 등에서 수많은 갈등을 낳았다.
과거 식민지 시절의 강제노동·수탈 구조는 사라졌지만, 자원 개발 이익이 현지보다 외부로 더 많이 유출되는 구조적 불평등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오늘날 고부가가치는 제련·금융·산업 부문 등 해외에서 창출되며, 중남미 지역은 토지 훼손·수질오염·주민 건강 문제 등 부작용을 감당하고 있다.
중남미 국가들은 이러한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자원 개발 모델을 모색하고 있다. 그 핵심은 지속가능성이다. 환경영향 최소화, 토착민 권리 보호, 광산 복원, 물 자원 관리, 생태 보호 등이 자원 정책의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다. “금 없이는 살아갈 수 있어도, 물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지역사회 구호는 이러한 전환의 상징적 표현이다.
특히 1980년대 이후 확산된 3R 원칙, 즉 책임성(Responsibility), 분배(Redistribution), 재인식(Recognition)은 중남미 자원정책의 변화를 이끄는 기본 틀로 자리 잡았다. 이는 자원 개발 과정에서 △기업·정부의 책임성 강화 △이익의 공정한 분배 △환경·기후·토착민 권리 재인식 등을 핵심 가치로 제시한다.
한국은 중남미 금·은 산업과 연계해 ‘과거의 식민적 자원 개발 모델과는 다른 방식’으로 협력 구조를 구축할 여지가 크다는 평가다. 한국은 중남미에서 금·은 채굴 경험이 거의 없기 때문에 역사적·정치적 부담이 적고, 대신 기술 기반의 파트너십을 구축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예를 들어 한국광해광업공단(KOMIR)이 추진해온 광해(폐광·폐기물) 복원, 환경정화, 재활용 기술은 중남미 국가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분야이다. 단순 채굴이 아니라 △환경 복원 △재활용 △정제 △배터리 소재 산업 연계 등 ‘광물→산업→기술’로 이어지는 밸류체인 구축은 중남미 경제가 오랫동안 필요로 해온 산업 고도화 전략과 맞닿아 있다.
한국이 중남미로 진출할 때 고려해야 할 전략은 ESR, 즉 공정성(Equity),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 상호성(Reciprocity)이다. 중남미 지역사회와의 공동 이익, ESG 중심의 자원 개발, 기술과 지식을 상호 교류하는 구조를 통해 중남미와 공존하는 자원 개발 모델을 만들 수 있다는 의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