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핵을 가진 북한’과의 공존을 말하다

“북핵을 상수로 인정하고, 현실적 방정식을 다시 세워야”
“2019년 북·미 판문점 깜짝 회동은 평화의 상징 아닌 경고”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이 지난 2017년 4월 20일 오후 중구 장충동 앰배서더 호텔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이 지난 2017년 4월 20일 오후 중구 장충동 앰배서더 호텔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2025년 현재, 한반도의 비핵화는 과연 가능한 일일까.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단언한다. 그는 “협상을 통한 한반도 비핵화는 도달 가능성이 없는 허상에 불과하다”며 “핵을 보유한 북한을 상대하는 우리의 사고방식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설파한다.

반세기 동안 한반도의 외교·안보 현장을 지켜온 송 전 장관도 한때는 비핵화의 실현 가능성을 믿었던 인물이다. 그는 2005년 9·19 공동성명을 설계한 6자 회담의 핵심 주역이었다. 그런 그가 입장을 바꾸자 날 선 질문들이 따라붙었다.

“2018년 이후 강연과 토론회에서 비판적인 질문을 자주 받았다. 그때마다 나는 ‘사실관계가 바뀌면 내 생각도 바뀐다’는 경제학자 케인스의 말과, ‘견해는 바꾸더라도 원칙은 지켜라’는 문호 위고의 말을 인용해 답했다.” 상황 변화에 따라 정책은 조정하되, 궁극적 목표는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현실적 셈법’을 찾는 것이 오히려 현실적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미 효력을 잃은 기존의 비핵화 접근법을 고집해서는 북핵 고도화를 막기 어렵기 때문이다. 송 전 장관이 “토론을 통해 여론을 형성하고, 그 기반 위에서 미래로 향하는 국론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유다. 그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담아 신간 <좋은 담장 좋은 이웃>을 펴냈다.

책은 모두 12개의 질문으로 구성돼 있다. 각 질문은 혼돈의 세계 질서 속에서 대한민국이 맞닥뜨릴 새로운 지평을 탐색한다. 특히 제3부 <평화와 통일의 정책은 왜 성공하지 못했는가>는 ‘페이스 메이커’를 자처하는 이재명 정부의 대북 정책에 날카로운 시사점을 던진다.

저자는 2019년 6월 깜짝 이뤄진 남·북·미 정상의 판문점 회동을 두고 “북한이 줄곧 주장해온 ‘조선반도 문제의 주인은 조선과 미국’이라는 논리가 그대로 드러난 장면이었다”고 평가했다.

“한국 대통령은 문밖에서 대기하고, 미국과 북한의 지도자가 양자회담을 가졌다. 이는 ‘나 없이 내 문제를 논하지 말라(Nothing about me, without me)’는 외교의 기본자세가 실종된 사건이었다.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벌어진 일로, 앞으로도 긴 그림자를 던질 가능성이 있다.”

이 같은 지적은 ‘북·미 정상회담이 성사되면 남북 간 화해와 한반도 평화가 뒤따를 것’이라는 이재명 정부의 대북 인식과 배치될 소지가 크다.

“미국은 필요하면 한국을 건너뛸 수 있다”

송 전 장관은 또한 한·미 동맹이 아무리 굳건하더라도, 미국은 결정적인 순간 한국을 배제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한다.

그는 “(2019년) 판문점 회동처럼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미국의 ‘보스 외교’ 성향은 한반도 정책에서도 꾸준히 드러났다. 북한은 늘 ‘통미봉남(通美封南)’ 전술을 구사했고, 미국은 이를 필요에 따라 수용해 왔다”며 “미국은 대북 정책에 관해 사전에 한국과 협의한다는 입장을 표방하지만, 최종 결정 단계에서는 협의 없이도 결정을 내릴 여지를 남겨 두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그의 시각은 이재명 정부의 ‘E(Exchange·남북 교류), N(Normalization·관계 정상화), D(Denuclearization·비핵화) 구상’에 일부 수정이 필요하다는 제언으로 읽힌다. 구체적으로는 남북 교류와 관계 정상화, 비핵화를 유도하기 위해 북한이 ‘끌릴 만한 도입부’가 실종됐다는 지적이다. 북한의 흥미를 자극하지 못하는 E.N.D 구상은 남한 내부 담론에 머무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송 전 장관은 서울대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1975년 외무고시를 거쳐 외교부에 입부했다. 이후 33년간 국가안보와 통일·외교의 최전선에서 활동했다.

그는 1999년 제네바 4자(남·북·미·중) 평화회담 차석대표, 폴란드 대사, 외교부 북미국장·기획관리실장·차관보, 김대중 대통령 외교비서관, 노무현 대통령 통일외교안보 정책실장을 거쳐 제34대 외교통상부 장관을 역임했다. 이후에는 국회의원(민주당)과 북한대학원대학교 총장을 지내며 남북 평화 정착에 헌신해왔다.

‘살아있는 한반도 외교사’로 불리는 송 전 장관의 신간 <좋은 담장 좋은 이웃>은 격동하는 동북아 정세 속에서 ‘신(新)안보의 정석’을 제시하는 책이다. 이 책은 한반도와 세계의 현실을 냉철히 바라보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권하는 필독서다.

특히 최근 국제질서는 미·중 전략 경쟁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그리고 북·중·러의 연대 강화로 급속히 양극화되고 있다. 한반도의 비핵화 문제 역시 이러한 글로벌 권력 재편의 한 축 속에서 재정의되고 있다. 북핵은 단순한 지역 안보 이슈가 아니라 미·중·러 간 세력 균형의 도구로 활용되고 있으며, 그만큼 한국의 외교적 선택지도 좁아지고 있다.

국제질서의 분절화 속에서 한국이 취해야 할 해법은 ‘비핵화의 이상’보다 ‘위기 관리의 현실’에 기반한 다층적 외교 전략을 세우는 것이다. 냉철한 현실 인식 위에서 지속 가능한 평화 전략을 모색하는 것, 그것이 지금 한국 외교가 풀어야 할 과제이자 송 전 장관의 문제의식이 향하는 지점이다.

좋은 이웃 좋은 담장
송민순 지음
생각의 창
2만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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